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는 生覺, 암연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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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경신, "詩는 죽었다"
11-24 14:57 | HIT : 1,546 | VOTE : 21
꼭 이맘때, 그러니까 겨울이 지나간 자리에 봄은 아직 이르지 못한 3월의 초입이었다. 법적으로 미성년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만으로 스무 살을 막 넘기던 그 때의 내 나이와도 비슷한 계절. 나는 교정의 잔디밭에 앉아 오들오들 떨며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읽었다. ‘아름다움은 파멸의 시작이다’라는 시구에 잔뜩 매료되어. 당시 나를 둘러싼 세계는 외줄타기를 하는 사람처럼 아슬아슬했다. 절망과 희망, 고통과 쾌락, 완전과 무(無)의 경계선 위에 나는 서 있었고, 그 중심부에는 늘 시(詩)가 있었다. 아니지, 시를 쓰는 사람들과, 시를 경배하는 사람들과, 시를 경멸하는 사람들과, 시를 모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매일 밤 우리는 감성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들어가 미친 듯이 시를 뱉어내고, 아침이면 그것을 찢어버렸다. 선배들은 감상과 낭만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했고 술집에서는 노래 대신 신동엽의 ‘금강’이나 김수영의 ‘사랑’이 낭독되었다.

모처럼 그 시절의 선배들을 만났다. 좌중에 취기가 오르고, 누군가 나에게 “너 왜 시는 안 쓰니?”라고 물었을 때, 나는 찬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굳어졌다. 시? 시라고? 그건 첫사랑이나 혁명처럼 이미 우리 마음 속에서 죽어버린 게 아니었던가. 그리고 내 마음은 첫사랑을 떠나보내고 혁명을 포기한 사람의 그것처럼 수많은 변명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시는 너무 많은 감성을 소비하게 만든다. 안이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 속 편한 나 같은 인간과는 어울리지도 않는다. 게다가 시는 돈이 안 된다. 근근이 모은 돈으로 시집 한 권을 사서 소중한 듯 가슴에 품어보는 시대는 지나갔다. 모두들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야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머리 떼고 꼬리 떼고 스토리만 있으면 먹어주는 시대.

잘 계산된 거짓말과 허를 찌르는 반전과 보다 자극적이고 더욱 화려한 묘사들이 대중을 점령하는 시대. 사람들은, 아니 나조차도,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감정보다 누군가의 비밀스러운 풍경을 알고 싶어한다. 망원경으로 맞은편 아파트에 살고 있는 그와 그녀를 훔쳐볼 뿐, 그와 그녀의 갈등·슬픔·절망·오해, 게다가 무어라 이름지을 수도 없는 오묘한 생각이나 감정의 변화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시는 불편하고 이야기는 친절하다. 시는 안하무인이고 이야기는 다정한 친구다. 시는 가난하고 이야기는 풍요롭다. 아니다, 나는 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 시절에 내가 쓴 시들은 모두 나의 본능이 쓴 것일 뿐 나의 이성은 처음부터 시 같은 건 몰랐다.

그리고 시는 죽었다. 내 속에 있던 시인은 죽었다. 다시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어버린 때에 이르러, 우리는 술의 힘을 빌려 우리 속에 존재했던 시인들을 그리워한다고 말했다. 나도 그가 그립다.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내 미천한 재능에 대해 비관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충혈된 눈으로 새벽을 맞으며 거칠어진 마음으로 원고지를 찢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는 가난해지기 싫은 것이다.

그러니까 정말로 이즈음이었다. 저녁이 오고, 잔디밭에 앉아 릴케를 읽으며 나는 울었다. 그 때 나는 알고 있었을까. 그것은 내 속에 있던, 젊은 나이로 요절할 운명을 타고난 어느 시인이 흘린 눈물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시절 나의 ‘시(詩)스승’이었던, 눈부신 시집 한 권만을 지상에 남겼던 그도 꼭 이맘때 세상을 떠났다. 시보다 먼저 나를, 스스로를, 세상을 떠나기로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이제, 이야기의 텍스트 안에서 모든 것은 한결 가볍고, 쉽고, 빠르게 굴러간다.

그러나 나는 가끔, 오래된 시집의 먼지를 털어내고 불안한 세계의 기억을 불러낸다. 그들은 내게 묻는다. 너는 지금 무엇을 갈등하고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는 거니. 어떻게 살고 있는 거니.

2003. 3. 7  황경신/PAPER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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