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는 生覺, 암연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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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맥키, 이야기에 대한 사랑
권혁주02-17 19:09 | HIT : 292 | VOTE : 27
(이야기는 낯설지만 몰입의 경험을 제공한다)
전형적인 이야기가 집 안에 머무른다면 원형적인 이야기는 여행한다. 찰리 채플린에서 잉그마르 베르히만에 이르기까지, 사튀야지트 레이에서 우디 앨런에 이르기까지, 영화사상 이야기 구성의 대가들은 항상 어김없이 우리가 고대하던 양면성을 가진 만남을 안겨준다.
첫째, 우리가 모르는 세계의 발견이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의 내용이 얼마나 내밀한 것이든 서사적인 것이든, 당대적인 것이든 역사적인 것이든, 구체적인 것이든 환상적인 것이든 관계없이 뛰어난 예술가들의 보여주는 세계는 항상 예외 없이 어딘가 이국적이 낯선 면모를 가지고 우리에게 충격을 안겨준다. 마치 탐험가가 숲속을 헤치고 나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눈을 크게 뜬 채 아직 아무도 손대 보지 못한 세계, 모든 상투성이 배제되고 모든 평범한 것들이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 세계 속으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둘째, 일단 이 낯선 세계 안에 들어가고 나면 우리는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등장 인문들과 그들이 겪고 있는 갈등의 가장 깊은 곳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인간성을 발견한다. 우리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은 새롭고 매혹적인 세계 속으로 들어가 처음에는 너무나도 나와 달라 보이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결국 우리와 똑같은 또다른 인간이 되어 살아보기 위한 것이고, 또한 우리가 매일 부닥치는 생활의 현실을 조명해 주는 가공의 현실을 살아보기 위한 것이다. (11~12쪽)

(오늘날에는 이야기가 인생의 의미를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전통적으로 인류는 서로에 관한 내밀한 통찰력을 통해 결합하여 생명력 있는 의미를 만들어내는 네 가지의 지혜들, 즉 철학, 과학, 종교, 예술로부터 아리스토텔레스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왔다. 그러나 오늘날 시험에 통과하려는 목적 없이도 헤겔이며 칸트를 읽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한때 가장 위대한 설명자였던 과학은 복잡함과 당혹함으로 삶의 참모습을 왜곡시키고 있다. 냉소를 머금지 않고서 경제학자나 사회학자, 정치가들의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종교는 많은 이들에게 위선을 가리기 위한 공허한 의식이 되고 말았다. 전통적인 이념들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가면서 우리들은 아직도 여전히 우리가 믿고 있는 것을 향해 돌아서게 된다. 이야기의 예술이 바로 그것이다. (중략) 극작가 장 아누이(Jean Anouilh)의 표현에 따르자면 “허구는 인생에 형식을 부여한다”. (22~23쪽)

솔직하고도 힘 있는 이야기 없이 문화는 진화해 나갈 수 없다. 겉만 번지르르한 채 속은 텅 비고 사이비 이야기들만 반복적으로 경험한 사회는 쇠락하고 만다. 인간 심리와 사회의 음침한 구석들에 신선한 빛을 뿌려줄 진실한 풍자와 비극, 드라마, 그리고 희극이 필요하다. (25쪽)

(잘 말해진 훌륭한 이야기)
훌륭한 이야기란 말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 즉 세계가 듣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이런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은 작가의 외로운 임무이다. 이 작업은 재능에서 시작된다. 작가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방법으로 이런저런 삶의 요소들을 한 데 결합시켜 내는 창조적인 능력을 타고나야 한다. 그러고 난 후 자신이 창조해낸 인물들과 세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통해 배가되는 인간 본성과 사회에 대한 신선한 통찰력에서 비롯된 전망을 자신의 작품에 불어넣어야 한다. 이러한 모든 것, 그리고 핼리 버넷(Hallie Bernettt)과 휘트 버넷(Whit Burnett)이 그들의 뛰어난 소책자에서 밝히고 있듯이 풍성한 사랑이 있어야 한다.
이야기에 대한 사랑, 즉 작가의 전망은 이야기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는 믿음, 등장 인문들이 실제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사실적일 수 있다는 믿음, 그리고 가공의 세계가 실제의 그것보다 훨씬 근원적이라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극적인 것에 대한 사랑, 즉 돌연한 사건들의 놀라움과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사실들에 매혹 당해야 한다. 진실에 대한 사랑, 즉 작가로 하여금 평생 인생의 모든 진실에 대해서 그 가장 깊은 비밀의 동기에 이르기까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는 천형을 지도록 만드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인간에 대한 사랑, 즉 고통받고 있는 영혼에 기꺼이 동감하여 그들의 내부로 들어가 그들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려는 사랑이 있어야 한다. 감각에 대한 사랑, 즉 육체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감각에 대해서도 열려 있으려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꿈에 대한 사랑, 즉 단순히 그 끝이 어디인지 가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도 상상의 고삐를 늦추지 않는 즐거움을 알아야 한다. 유머에 대한 사랑, 즉 삶의 균형을 회복시켜 주는 여유를 아껴놓는 기쁨을 알아야 한다. 언어에 대한 사랑, 즉 소리와 그것들이 주는 감각, 문장의 구성과 그 의미에 대한 탐구가 주는 재미를 알아야 한다. 이중성에 대한 사랑, 즉 삶 속에 감춰져 있는 이중성을 감지해 내는 능력과 사물들의 본질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를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강한 의구심이 있어야 한다. 완전함에 대한 사랑, 즉 완전하다고 느끼는 순간에 도달하기까지 쓰고 또 고쳐쓰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 독창성에 대한 사랑, 즉 대담하게 독창성을 추구하며 조소를 당할 때에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 즉 좋은 작품을 소중히 여기고 나쁜 작품을 싫어하며 그 둘 사이의 차이를 아는 내밀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즉 남들에게서 끊임없이 인정받지 않아도 견딜 수 이쓰며 자기 자신이 진정한 작가라는 것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작가는 작품을 쓰는 행위를 사랑해야 하고 외로움을 견뎌낼 줄 알아야 한다. (38~39쪽)

(이야기가 교향곡이라면 작가는 지휘자이다)
작곡가가 작곡상의 원칙들에 뛰어나야 하듯이 작가 역시 이야기를 구성하는 데 필요한 원칙들에 정통해야 한다. 이 기능은 단순히 기계적인 것도 눈속임도 아니다. 그것은 작가가 자신과 관객 사이에 재미의 음모를 창조하기 위해 사용하는 기술들의 총합체이다. (39쪽)

(이야기꾼은 삶을 다루는 시인이다)
인물의 초상이나 볼거리에만 집착하는 작가들, 아니 모든 작가들은 이야기와 삶의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해야한다. 이야기는 삶에 관한 은유라는 사실을.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매일매일의 생활, 내면 생활과 밖으로 드러나는 생활, 그리고 꿈과 행동을, 언어보다는 일련의 사건들로 구성된 시로 써내는 예술가라는 점에서 삶을 다루는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두시간에 걸친 사건들의 은유를 통해 이렇게 말한다. 인생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45쪽)


사람들에게 사소한 소재에 대한 것이지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와, 소재는 뛰어나지만 재미없는 이야기 중 하나를 고를 기회를 준다면 누구나 다 전자를 고를 것이다. 이야기의 대가들이 사소한 소재에서 삶을 끄집어낼 줄 아는 재능을 가진 반면에, 그런 재능이 부족한 작가들은 뛰어난 소재조차 평이한 것으로 전락시킨다. (50쪽)

(이야기는 교향곡이다)
아름답게 표현된 이야기는 구조와 배경, 인물, 장르 그리고 아이디어가 매끄럽게 녹아 들어간 교향악 같은 유기체이다. 이들 간의 화음을 얻으려면 작가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들을 오케스트라의 악기들로 이해하고 연구해야 한다. 처음에는 따로따로, 그러고는 합주를 해가면서. (53쪽)

(아크플롯을 써야하는 이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에는 완전하고 취소 불가능하고 닫힌 결말이 있으며, 자신들의 갈등의 주원인은 자신들 외부에 있으며, 자기 자신이야말로 자신의 삶에 있어서 유일한 활동적인 주인공이며, 자신의 삶은 연속적인 시간 속에서 지속적이고 인과적인 내적 연관성을 지닌 사실성에 근거해 유지되고 있으며, 모든 사건들은 바로 이 사실성 안에서 이해될 수 있고 의미 있는 이유를 가지고 일어난다고 믿는다. (중략) 대다수의 사람들은 안티플롯의 비연속적인 사실성과 미니플롯의 내면화된 수동성, 그리고 논플롯의 변화 없는 순환성 등을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삶에 대한 은유로서 인정하지 못한다. (99~101쪽)

스타니슬라브스키가 자신의 배우들에게 물었다. 당신이 사랑하는 것은 당신 안에 존재하는 예술인가, 아니면 예술 안에 존재하는 당신인가? 작가들도 자신이 선호하는 글쓰기 방식에 대해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105쪽)

상투성은 관객이 어떤 작품에 대해 불만을 가지게 되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이다. (중략) 모든 상투성의 근원을 추적해 올라가다 보면 단 한 가지의 원인에 도달하게 된다. 작가가 자신이 쓰고 있는 이야기 안의 세계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작가들은 사실은 그렇지 못하면서도 어떤 허구의 세계에 대해 자신들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가정하에서 상황을 설정하고 대본을 써내려 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막상 구체적인 소재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을 때에는 아무것도 건져내는 것이 없게 된다. (중략) 이야기에서 다뤄지는 세계에 대한 통찰력과 지식은 작품의 독창성과 탁월함을 위한 근본적인 요소이다. (108쪽)

어떤 아이디어가 감정의 흐름을 타고 움직일 때 그 아이디어는 훨씬 강력하고 근본적이며 훨씬 기억에 남는 것이 된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시체를 목격한 일은 잊혀질 수도 있겠지만 햄릿의 죽음은 영원히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예술에 의해 형식화되지 않은 인생 그 자체는 혼란스러운 경험으로 남아 있을 뿐이지만 미학적 정서는 우리가 아는 것, 느끼는 것들에 질서를 부여해서 이 세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정확히 이해하게 만들어준다. 단순히 말해 이야기는 우리가 인생 자체에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쥐어준다. 의미 있는 정서적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실제 인생의 경험은 시간이 흐른 뒤에 반성을 통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지만 예술에서는 모든 경험이 그것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에 이미 의미를 가지고 있다. (173쪽)

(계몽주의에 대해)
위험 요소는 이런 것이다. 작가가 세상에 널리 증명하고 싶어하는 어떤 아이디어가 작품의 전제가 될 때,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게끔 확증하는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설계할 때 작가는 계몽주의에 빠진다. 관객을 설득하는 일에 열중하다 보면 이야기 안에서 한쪽 축을 이뤄야 할 목소리가 질식할 것이다. 예술을 설교 수단으로 오용 또는 학대하다 보면 그 작가의 시나리오는 세상을 개종시키기 위해 영화로 서투르게 위장한 설교나 논문밖에는 안 된다. 계몽주의란, 예술은 사회의 암을 수술해 내는 메스로 사용될 수 있다고 믿는 천진한 낙관주의의 산물이다. (189쪽)

(관객과의 연계)
관객은 주인공과의 동일시라는 접착제에 의해 영화에 정서적으로 개입한다. 작가가 이 연계를 만드는 데 실패하면 관객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영화의 바깥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정서적 개입이란 이타심이나 자애심 같은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관객과 주인공의 자기 동일시는 아주 개인적인, 심지어는 이기적인 이유에서 비롯된다. 관객이 주인공과 그의 삶 속에서 바라는 것에 자신을 동일시할 때, 사실 그것은 관객 스스로가 자신의 삶의 욕망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과 허구적 인간과의 연계인 자기 동일시를 통하여 관객은 자신의 인간성을 시험해 보고 확장시킨다. 따라서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경험적 영역 밖으로 우리의 삶을 확장시켜 주는 선물이다. 이 선물을 통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다양한 내적 깊이의 욕망과 투쟁을 경험한다. 그런 의미에서 호감이 선택항이라면 자기 동일시는 필수항이다. 누구나 동정심은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인가를 배풀어주고 싶은 마음이 우러나오게 하지는 않는 인물을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주인공은 마주 대하기에 즐거운 사람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호감과 자기 동일시, 이 두 가지의 차이를 간과하는 작가들은 자동적으로 자기 작품의 주인공을 선량한 인간으로 정해 버리게 된다. (217~218쪽)

-발췌 :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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